아내에게 건네는 뒤늦은 후회와 사랑
시인이자 작사가인 조운파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어머니가 한평생 힘들게 제사상을 차리고 7남매를 키우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 노래의 가사를 썼다고 전한다. 작곡을 맡았던 임종수 또한 90세가 넘은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다 암에 걸려 세상을 뜬 아내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는 고백으로 눈시울을 적셨다.
애절한 가사와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 나지막한 미성의 가창 등 히트곡이 갖춰야 할 조건들을 절묘하게 충족시키는 이 노래에 대중의 관심이 쏟아진 건 물론이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미운 투정 고운 투정 말없이 웃어넘기고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가는 세월에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하나둘 늘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가슴으로 삭여야했던 여성, 특히 아내들의 시린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노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 노래는 당시 카바레에서 제일 기피하던 금지곡이었다.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추던 부녀자들이 이 노래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한해 전, 가요계를 강타했던 대마초 파동으로 불황에 빠져 있던 음반시장에서 이 노래의 빅히트는 막힌 혈관을 뻥 뚫는 듯한 응급처방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들은 음반시장 관계자들의 말을 빌어 “그나마 음반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노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최헌의 <오동잎> 그리고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1976년 12월 22일 조선일보가 그해 가요계를 진단하는 기사에서도 젊고 재능 있는 미남 가수의 등장에 대한 기대감을 확인할 수 있다.
“대마초 열파로 남자가수 빈곤의 76년도 가요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신인이 하수영 군이다. 금년 5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발표, 방송가의 스타덤에 오르면서 디스크판매 1만 장을 돌파하는 기록도 세운 행운아. 질감 있고 폭넓은 저음으로 발라드풍의 노래를 불러온 하 군은 ‘청소년들이 부를 만한 마땅한 노래가 없다’면서 ‘앞으로는 젊은이들이 호응하는 의미 있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밝혔다. 고교 때 성악 공부를 한 외에도 작사, 작곡, 편곡도 직접 해내는 탤런트로서 자작곡만도 100곡이 넘는다고. 연말연시 특집 프로그램 출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하 군은 새 노래를 수록한 음반을 1월 초에 선보인다. 취미는 바둑(3급), 유도 3단의 수려한 용모로 77년의 활약이 기대되는 가수다.”
스타 공백기 혜성처럼 등장한 미남 가수
연예 매체들에겐 인기상종가로 떠오른 신인가수 하수영의 전속계약 소식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가수들은 일정기간 한 제작사에서 활동하다 계약기간이 끝날 시점에 유리한 조건을 따져 소속사를 옮기거나 재계약을 맺는 게 관례였다. 그 조건이란 대개 ‘전속금’이 좌우했는데 A급의 경우 100만~150만 원선, 기대치가 있는 신인의 경우 60만 원~100만 원 정도였다. 계약 기간은 보통 1년 6개월 정도였다. 당시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통해 심상찮았던 그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히트곡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러 갑자기 주가가 오른 하수영이 서라벌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그동안 계약조건 없이 하 군에게 취입을 시켜왔던 서라벌레코드는 ‘아내에게…’가 히트하자 여기저기서 유혹의 손길을 뻗쳐와 전속금 1백만 원을 지불하고 전격적으로 계약을 맺은 것.”
1976년의 국내 가요계는 대마초 쇼크와 각종 스캔들로 유례없는 혼란과 변화 속에 진통을 겪고 있었다. 연예계는 구속, 불구속되는 연예인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 대부분에게 방송출연 및 공연활동 정지 처분이 내려지면서 TV, 라디오, 밤무대, 공연계 할 것 없는 불황이 찾아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타격이 심한 곳이 가요계였다. 가수, 작곡가, 악사에 이르기까지 대마초 연예인의 대부분이 가요계 종사자였기 때문이다.
스타 부재의 진공상태를 메울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해는 ‘신인 홍수의 해’라 할 만큼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선을 보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해 가수협회에 새로 가입한 신인들은 모두 140여 명에 이르렀는데 한 일간지는 급부상한 신인들의 활약을 이렇게 정리했다.
“기성가수의 공백을 메우고 새롭게 인기가 오른 가수는 김인순, 정종숙, 이은하, 채은옥, 선우혜경, 백남숙, 혜은이(이상 여자), 이수만, 하수영(이상 남자) 정도. 이들의 노래가 기성가수인 송대관, 금과은, 이미자, 조미미, 김세레나, 김상희 등과 함께 방송과 레코드 업계를 누볐다.”
노래의 빅히트에 힘입어 공연과 방송출연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던 하수영의 전성기는 생각만큼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1977년 6월 22일, 전주문화방송 개국기념 공연을 위해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가다 운전 부주의로 앞서가던 트럭과 충돌, 오른쪽 발목과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함께 탔던 운전사가 전치 5개월의 중상을 입었을 만큼 큰 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