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의하면 이때 50대의 나이였던 개스비는 간송에게 ‘향이 좋은 커피’를 대접했다고 한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짧은 순간 두 사람은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확실한 건 두 사람 모두가 흥정에 더 유리한 조건 따위를 고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말없이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를 응시하던 개스비가 입을 열었다.
“일본 침략 이후 조선의 귀중한 유물들이 안목이나 애정도 없는 일본인들 손에서 좌지우지되는 게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 선생 같은 조선인이 애정을 보여주시니 맘이 놓입니다. 좋습니다! 제 수장품 모두를 선생께, 아니 조선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서른두 살의 간송이 스무 점의 개스비 컬렉션을 모두 인수하는 데 든 비용은 40만 원, 당시 시세로 서울 시내 기와집 400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하지만 간송에겐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할 귀한 물건이었다. 그때 사들인 개스비 컬렉션 중 9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도 간송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도 간송이 일본인들로부터 지켜낸 우리 문화유산은 너무 많아 일일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같은 화공들의 그림은 물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석탑 등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유산과 유물이 간송 한 사람의 노력에 힘입어 민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의 돈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던 간송은 돈을 써야 할 일에는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여는 호남아였다. 귀한 물건이라면 값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소문 덕분에 일본인들이 호시탐탐 침을 흘리던 진귀한 고서화, 서적, 도자기에 대한 정보가 빠짐없이 흘러들었다.
1940년경, 오랜만에 한남서림에 들른 간송의 눈에 바쁜 걸음으로 가게 앞을 지나는 서적 골동상인 하나가 포착된 것 또한 천운(天運)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옛 서적을 거간하러 가끔 들르던 상인이 그날따라 허둥지둥 가게 앞을 지나치는 걸 이상하게 여긴 간송은 사람을 내보내 가게 안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내내 안절부절 못하던 그가 마침내 간송에게 엄청난 소식을 털어놓았다. “실은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돌아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해서 저도 지금 백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는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