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는 어항 밖 대기(大氣)를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이라 생각한다.
금붕어는 어느새 금빛 비눌을 입었다 빨간 꽃 잎파리 같은
꼬랑지를 폈다. 눈이 가락지처럼 삐여저 나왔다.
인젠 금붕어의 엄마도 화장한 따님을 몰라 볼게다. //
금붕어는 아침마다 말숙한 찬물을 뒤집어 쓴다 떡가루를
흰손을 천사(天使)의 날개라 생각한다. 금붕어의 행복은
어항 속에 있으리라는 전설(傳說)과 같은 소문도 있다. //
금붕어는 유리벽에 부대처 머리를 부시는 일이 없다.
얌전한 수염은 어느새 국경(國境)임을 느끼고는 아담하게
꼬리를 젓고 돌아선다. 지느러미는 칼날의 흉내를 내서도
항아리를 끊는 일이 없다. //
아침에 책상 위에 옮겨 놓으면 창문으로 비스듬이 햇볕을 녹이는
붉은 바다를 흘겨본다. 꿈이라 가르켜진
그 바다는 넓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
금붕어는 아롱진 거리를 지나 어항 밖 대기(大氣)를 건너서 지나해(支那海)*의
한류(寒流)를 끊고 헤엄쳐 가고 싶다. 쓴 매개를 와락와락
삼키고 싶다. 옥도(沃度)빛 해초(海草)의 산림속을 검푸른 비눌을 입고
상어에게 쪼겨댕겨 보고도 싶다. //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버려야 한다. 배설물(排泄物)의 침전(沈澱)처럼 어항 밑에는
금붕어의 연령(年齡)만 쌓여간다.
금붕어는 오를래야 오를 수 없는 하늘보다도 더 먼 바다를
자꾸만 돌아가야만 할 고향(故鄕)이라 생각한다.
_ 김기림, <금붕어>
*지나해 : 일본에서 말레이반도 남단에 이르는 태평양 해역
이 시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라는 특정 대상을 소재로 한다. 고향을 잃고 좁은 공간에 갇혀 길들여지고 있는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물고기는 모든 물길이 모여드는 근원적인 공간인 바다에서 살아갈 때 자유와 생명성을 가진다. 원초적인 생명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어항 속의 삶에 맞춰 길들여진 채 살아가는 금붕어는 현대인의 삶을 우의적으로 드러낸다. 금붕어가 회복해야 할 본성과 생명력은 그저 ‘전설(傳說)과 같은 소문’과 같은 일로 치부되고 있다.
모더니즘 시들의 또 다른 특징은 공간적 이미지를 통해 현대 문명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 시에 나타나는 어항과 대기 밖의 하늘, 바다는 현실의 억압된 공간과 자유와 생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원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어항의 물을 매일 아침 갈아주고, 먹이를 주는 ‘하얀 손의 천사’는 평온한 삶을 금붕어에게 제공하지만 금붕어로부터 원초적인 자유를 박탈한다. 시인은 ‘유리벽에 부대처 머리를 부시는 일이 없’는 금붕어의 행위에서 꿈꾸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금붕어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현대 문명에 길들여져 가는 현대인을 나타내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대 문명의 속성을 제시함으로써 문명 비판적인 의식을 드러낸다. 특히 ‘금붕어는 그러나 작은 입으로 하늘보다도 더 큰 꿈을 오므려 죽여버려야 한다’는 문장은 어쩌면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당대인들에게 내린 선언문이 아니었을까. 찰리 채플린이 그러했고, 김기림이 그러했듯이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확장된 현대사회는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리라는 것을 그들은 1930년대에 미리 꿰뚫어 보았다.
새장 속의 새는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문명 비판을 기조로 이어가는 현대시의 창작 경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조금 더 세련되어졌고, 다양한 상황에서 주제 의식을 밀고 나아가지만 본질적인 성격은 많이 바뀌지는 않아 보인다. 현대인의 다양한 삶의 층위를 여러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 시인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시의 내용 또한 변주되고 있다는 점은 현대 문명의 폐해가 여전하다는 방증이다.
알레고리는 이런 방증을 밝히는 데에 아주 유용한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1980년대에 등단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기택 시인의 시에서도 알레고리가 보인다. 이 시에서 현대인의 우울한 일상은 새장에 갇힌 새로 치환되어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