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서쪽 지역을 흔히 서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에 당신은 반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지요. 붕당의 영수가 사는 곳을 중심으로 당쟁이 세력화하던 과정을 이야기하며 흥분한 적도 있었지요. 서촌이라는 이름에도 봉건적 신분 사회의 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했죠.
서촌의 이름이 결코 서민들의 삶을 중시했던 이름이 아니라는 말을 구두소리처럼 또각또각 내던 당신의 목소리가 새삼스레 듣고 싶어집니다. 당신과 제가 서촌을 걸었던 때는 지금처럼 한옥마을로 새롭게 정비되고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기 이전의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주말 나들이할 곳으로 알려지기 이전이었지요. 세검정을 거쳐 부암동에서부터 이곳 경복궁 근처 통인동까지, 당신과 산책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중심과 주변, 안과 밖을 구분해 차별화하려는 경계 의식의 결과가 서촌이었다고 하던, 당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당신이 없는 이 길을 혼자 걷습니다. 짧은 서촌 기행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마을버스가 올라가는 길을 따라가면 수성계곡이 나옵니다.
당신과 이곳을 처음 왔을 때 물길이 흐르고 있던 곳이 지금은 계곡 바닥이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마른장마가 이어진 탓인지 계곡은 아직도 물길이 힘차게 흐를 여름을 준비 중입니다. 인왕산 기슭과 이어진 이 계곡은 세종이 아들 안평대군에게 지어준 집이 있던 곳이지요. 그 사궁의 이름이 수성궁이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운영전》의 슬픔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요. 안평대군의 궁녀였던 운영의 비극적 사랑은 이곳에서 몇백 년을 가감 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된 수성궁이 이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신은 운영의 사랑을 말하며,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은 진정한 비극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소설이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시작되어야 하며, 그 사랑의 실패 또한 당사자들의 주체적인 결정으로 매듭지어야 한다고도 말했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신분의 궁녀 운영은 봉건 시대의 희생된 인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제한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운영의 사랑과 죽음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이었던 것이죠. 수성계곡은 안평대군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수성계곡은 운영의 운명적 절규가 계곡물을 따라 흐르는 곳으로 기억될 겁니다.